몰랑몰랑한 푸딩

molding0.egloos.com

포토로그



달빛팬루 메이플

은은한 달빛이 조용한 바람과 함께 다가왔다.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져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엘리니아는 신기하게도 달의 여신의 가호라도 받은듯 유독 달빛이 강한 곳이었다. 울퉁불퉁한 가지들이 땅에 내려앉는 달빛에게 길을 양보하기라도 한듯, 그 둥근 달이 여과없이 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 새하얀 빛의 조각들을 받노라면 마법에라도 걸린 것마냥 머릿속이 뿌옇게 변했다.

어쩌면 그 마력이 눈에도 끼었던걸지도 몰랐다. 옆에 나란히 앉아있던 새하얀 소년이 다시금 제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의 근처에서 은은히 그 빛을 발하는 오브와 찬란한 빛의 정령들.
단순히 그가 빛의마법사이기 때문이라는건 잘 알지만, 순간 그의 모습이 땅에 내려온 달의요정 같아 턱 숨이 막혀왔다. 이제는 소년이라고 하기에 어려운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사람이다. 그 하얀 상아상 같은 자태에 은은한 달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분위기에 취했던걸까. 저도 모르게 평소라면 잘 숨겼을 속내를 흘리듯 들켜버렸다.


"달이.... 아름답네요..."


말을 꺼내고도 제가 더 놀라 힐끔, 그를 바라봤다. 감히 닿아서는 안되는 새하얀 순수에 처음으로 발자국을 남기는 꼬마아이의 기분이었다. 그런 죄책감과, 다시는 돌이킬수 없는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심장이 기이하도록 뛰어댔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선 슬그머니 작은 기대감이 고개를 들었다.

혹시 내 마음을 알아줄까, 받아주진 않을까.

묘한 기대감을 안고 그를 바라봤다. 갑작스런 혼잣말에 반응하듯 저를 돌아보는 그의 붉은눈이, 오늘따라 유독 뜨겁고 설레여서. 어쩌면 오랜 속앓이를 알아채주는걸까, 진지한 생각으로 그의 두 눈을 마주했다.
아, 정말. 몇번을 마주해도 진정이 되질 않아. 입을 맞춰버릴까, 세게 끌어안을까.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세계 제일의 괴도의 마음을 훔쳐버린 널 어떻게 해야할까. 몇번을 고민하면서도 내 눈은 너의 입술에 고정되어 있어서, 내 마음을 쥐락펴락할 너의 대답을 기다리면서도...


"....무슨 헛소리냐, 좀도둑."


그렇지만 너의 대답은 늘 한결같아서. 잔뜩 긴장했던 나를 단번에 바보로 만들어버리곤 자신이 무슨 짓을 한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봤다. 비죽 올라간 짙은 눈썹과 꾹 앙다문 고집스러운 입매. 하기야, 이래야 샌님이지.
그야말로 달과 같은 사람이다. 닿을수도, 닿지도 않는.


"응? 아냐, 됐어. 멍청한 샌님은 죽어도 모를 이야기랄까."


그러나 늘 바라보고, 늘 품에 안고싶은 사람.
매끈한 얼굴을 씨익- 둥글게 휘고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심장은 늘 그렇듯 제 페이스를 찾았다. 늘 먼저 반해버린 쪽이 지는거니까. 생긴것처럼 마음까지 하얀 사람이라, 그 순수함마저 사랑해버린건 분명 이쪽이었다. 그렇기에 늘 야속하면서도 다시한번 반해버릴 수 밖에 없어.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여전히 불퉁스러운 얼굴로 저를 쫓아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휘휘, 젓는 손에 더 놀릴까 하다가 이내 비식 웃고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여간 낭만이라곤 죽어도 모르는 샌님이라니까.


"샌님도 그만 청승부리고 어서 들어가, 귀여운 아가씨 걱정시키지나 말라고."


언덕을 내려가며 힐끗 그를 향해 덧붙였다.
샌님과 동거중이라는 그 소녀의 걱정따위 전혀 알 바는 아니었지만 슬슬 바람이 차갑게 식어갔다. 혹여 감기라도 걸리는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아니, 그쪽도 나쁘진 않을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그의 뒷모습을 눈에 담곤 미련이라도 생길라 서둘러 저만의 비공정으로 돌아갔다.

하늘 위의 달을 바라본다. 그렇지만 역시 방금전과 같은 아름다움은 느껴지지 않아서, 그대로 눈을 감고는 다시금 새하얀 빛을 되새겼다.


***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사라졌다. 뒤돌아보진 않았지만 굳이 보지 않아도 그가 돌아갔다는걸 알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시끄러운 녀석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여즉 식지않는 얼굴을 두손으로 부여잡곤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좀도둑 같으니라고, 도대체 그런 말은...."

달이 아름답네요


금방이라도 터질것 같은 심장에 으으 앓는 소리를 냈다. 매끈한 얼굴을 떠올리자 더욱 거세게 뛰어대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머리속을 가득 채운 붉은 열기에 굴복해버려, 김까지 올라오는듯한 기분에 하염없이 달을 올려다봤다.
그렇지만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나. 달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팬텀-그의 모습이 다시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다시금 이성적인 생각을 할수가 없음에, 괜시리 그를 탓하며 두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전력] 잊혀질 메이플

0.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그 아름다운 선율을 다시한번 듣고싶었다.



1.
텅빈 시간의 신전은 그 누구의 발자국도 남아있지 않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전투의 흔적과 무너질듯 내리는 빗소리뿐.
얼음속에 갇힌 자신의 오랜 친우를 등지고 다시한번 방문한 그 고요함 속에서 그는 그저 그 모든것을 다시금 찬찬히 바라본 후에야 떨리는 숨을 들이쉬었다.
이 적막은 어째서 내 숨을 조여오는건가. 차갑게 식은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빗소리는 서늘한 냉기가 되어 그의 목을 졸랐고 여즉 어둡게 물든 하늘은 그 빛을 되찾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분명 세계를 구했음이 분명한 영웅임에도 세계는 그에게 빛을 허락하지 않았다. 단 한줄기의 빛도 보이지 않음에 그 앞에 보이는 것은 분명 나락이었다.


"아란... 루미너스... 팬텀... 메르세데스..."


나는 무엇을 구했는가.
대답없는 동료들의 이름을 부르며 로드를 손에 쥐었다. 이제는 지킬만한 것들을 모두 잃어, 더 이상 쓸 일이 없는 로드는 그 머리를 바닥으로 내린채 힘없이 늘어졌다. 그의 머리도 따라 바닥을 향해 떨궈지듯 수그러졌다. 연신 그리운 이름을 불러대는 목소리도 점차 작아졌다. 그와 동시에 그를 부르는 동료들의 목소리도 점점 희미해져갔다.

'프리드!'
잊혀질듯 희미한 목소리만이 떨어지는 그를 붙들고 있었다. 그저 붙들뿐인 목소리라, 이를 악물고 알수없는 먹먹함에 되는대로 소리를 질러댔다.
이런 결말을 기다려왔던 것이 아닌데, 이런 끝을 바라고 이 세계를 위해 달려온것이 아닌데. 진리에 통달한 대마법사도, 희생으로써 세상을 밝히는 성자도 되고싶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길이 그것뿐이라 그저 있는 힘껏 내달렸을뿐. 심지어 그 끝조차 완벽하지 않아서, 저 심연에서 새어나오는 어둠을 바라보며 그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억눌린 신음을 내뱉는것 외엔 할 수 있는것이 없었다.

평화를 위해 달려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이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지금의 나로썬 그게 무엇이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않아.
새하얗게 질리도록 세게 쥔 주먹을 공중에 내리꽂았다.



2.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기위해 살아간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었다.
잊혀져가는 지금에서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3.
동료들의 흔적을 찾아 이 세계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뜨겁게 작열하는 사막이나 햇빛조차 들지않는 울창한 숲, 사람보다 펭귄이 더 많은 냉대지역까지. 전쟁이 끝난 이후, 그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돌아다니며 동료들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어쩌면 나 자신의 흔적을 찾아 다닌건지도 몰라. 쓰게 웃으며 망토를 여미는 그의 눈에 높은 나무 사이사이로 작은 페어리들이 눈에 띄었다.

슬슬 도착한걸까. 텔레포트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페어리들을 피해다니던 와중 선선히 제 얼굴을 휘감는 바람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주위를 경계하던 그의 얼굴에서 긴장이 눈녹듯 사라졌다. 그 대신 물씬 올라오는 그리움에 금새 울어버릴듯 일그러졌다.

이곳이 마지막이야. 아름답게 흩날리는 벚꽃잎을 맞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얼음에 갖힌 엘프들이 그대로 세월의 풍파를 빗겨가는곳. 그들의 왕을 영원히 잊지않고자 봉인을 받아들인 그들의 표정은 심지어 평온해보이기 까지 했기에 그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마침내 무거운 고개를 떨궜다.

영원히 새겨질 그 의미가 미치도록 부러우면서도 잊혀지지 않을 친우의 존재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혼자 남겨진 데에 대한 미안함과....

고개를 든 그의 눈에 커다란 악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의 귓가에 그리운 선율이 흘러내렸다. 아름다운 바람을 그대로 담은 듯, 그의 아름다운 동료는 늘 이곳에서 여유로운 표정으로 저 하프를 퉁기곤 했다. 그 모습이 그대로 새겨진듯 눈앞에 떠올라, 마침내 그의 눈에서 방울이 떨어질 무렵. 바람이 하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4.
잊혀지는게 두려웠기에 그들을 잊혀지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스스로가 의미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기보단 차라리 언젠가 깨어날 그들의 기억속에 영원히 남기로 했다.
손 안에 담긴 작은 반지를 보며 웃었다.

1